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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세계인의 고전문학15

러시아 귀족문학을 대중문학으로 이끈 국민문학 창시자 푸시킨이 4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최고 산문소설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 러시아 최고의 천재적 시인,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등은 푸시킨을 지칭하는 대표적 찬사들이다. 19세기 초까지 러시아 문학은 참다운 대중문학이 아니라, 다만 서구문학의 모방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귀족문학이었다. 푸시킨에 이르러 러시아 문학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으며, 세계적 의의를 갖기에 이른 것이다. 푸시킨은 국민의 실생활과 동떨어진 종래의 낡은 러시아 문어를 일반 회화어와 접근시켜 근대 러시아 문장어를 정리하는 거대한 사업을 완성함으로써 문학을 대중에게 개방했고, 러시아의 자연과 국민생활을 정확히 반영시킴으로써 러시아 리얼리즘의 새로운 면모..
러시아 귀족문학을 대중문학으로 이끈 국민문학 창시자
푸시킨이 4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최고 산문소설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 러시아 최고의 천재적 시인,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등은 푸시킨을 지칭하는 대표적 찬사들이다.
19세기 초까지 러시아 문학은 참다운 대중문학이 아니라, 다만 서구문학의 모방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귀족문학이었다. 푸시킨에 이르러 러시아 문학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으며, 세계적 의의를 갖기에 이른 것이다.
푸시킨은 국민의 실생활과 동떨어진 종래의 낡은 러시아 문어를 일반 회화어와 접근시켜 근대 러시아 문장어를 정리하는 거대한 사업을 완성함으로써 문학을 대중에게 개방했고, 러시아의 자연과 국민생활을 정확히 반영시킴으로써 러시아 리얼리즘의 새로운 면모를 개척하였다. 18세기 이래 줄기차게 자라온 야만적 농노제와 전제정치에 대한 반항, 민족의식의 앙양과 조국에 대한 사랑, 자유에의 동경 등은 그의 작품에 박력 있게 표현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러시아 최초의 민족시인이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대위의 딸>은 산문소설의 대표작으로 운문소설인 <예브계니 오네긴>과 더불어 푸시킨 예술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푸시킨이 죽기 수개월 전인 1836년 10월에 완성되었으나, 실은 1833년에 착수하여 완성을 보기까지 근 4년이라는 시일이 걸렸다. 푸시킨이 얼마나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는가 알 수 있다.
톨스토이는 <대위의 딸>을 ‘푸시킨 산문 예술의 극치’라고 했으며, 또 어떤 평론가는 ‘푸시킨은 이 소설에서 최고의 완성을 보았다’ ‘이것은 근대 사실주의 소설의 원천이다’라고 했다. 특히 벨린스키는 ‘내용의 진실성과 단순하고 선명한 수법으로 보아, 그 성공은 하나의 기적이다’라고까지 격찬하고 있다.
알렉산드로 푸시킨
(Aleksandr Seraggvitch Pushkin 1799~1837)

러시아의 시인․작가․극작가. 1799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출생. 그의 가문은 약 5백 년의 전통을 가진 이름 있는 귀족이었으며,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러시아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었다.
1817년 한때 외무성에 취직했으나 관리생활에는 관심이 없었고 주로 시작에만 전념했다. 1820년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완성, 그 무렵부터 자유주의적 인텔리 청년들의 혁명적 비밀결사인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들과 친교를 맺고 <자유> <농촌> <챠다예프에게> 등의 선동적 풍자시를 썼다. 그리하여 푸시킨은 정부로부터 ‘불온한 자유주의 시인’이라는 레테르가 붙여져 1820년 페테르스부르크로부터 남러시아로 추방되었다. 그때부터 전후 6년간에 걸치는 유형생활 중에 서사시 <카프카스의 포로>를 완성하고, <예브계니 오네긴>에 착수하였다.
1831년(32세) 푸시킨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2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구혼해온 나탈리야라는 미모의 여인과 결혼했다. 나탈리야는 미인이기는 했지만 이해심이 없고 경박한 사교계의 부인이었다.
1831년부터 37년에 이르는 불행한 결혼생활은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 푸시킨을 궁지에 빠뜨리게 했다. 궁중무도회에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그의 아내는 주위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만 힘썼기 때문에, 예술의 자유를 부르짖던 푸시킨도 이제는 아내의 장신구를 사들일 돈을 벌기 위해 붓을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작품에 대한 당국의 검열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마침내 푸시킨은 신경질적인 흥분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의 예술적 천분은 더욱 원숙의 경지에 도달하여 수많은 걸작들을 발표했다. 10년 전부터 손을 대어온 장편 서사시 <예브계니 오네긴>을 완성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의 문학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나, 사치한 아내로부터 오는 물질적 압박과 심적 고민은 1836년 말경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저속하고 부패한 상류사회에 대해 깊은 증오와 모멸을 느끼면서도 거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무력감은 감수성이 강한 그의 마음을 극도로 혼란케 했고, 설상가상으로 아내 나탈리야에 대한 추문은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푸시킨을 미워하던 궁중 귀족들은 그의 아내와 페테르스부르크 주재 네덜란드 공사의 양자인 근위 장교 단테스와의 염문을 과장해서 퍼뜨리는 한편, 비겁한 중상과 음모로 푸시킨의 명예심과 자존심을 건드려 마침내 푸시킨으로 하여금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하여 1837년 1월 27일 푸시킨은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이틀 후인 29일, 39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마쳤다. 경찰은 이 결투를 중지시킬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까지 생전과 다름없이 박해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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