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적․이국적․성적 모티프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작품세계
동경의 세계를 서정적 문체로 승화시키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먼저 <돼지>는 얼핏 보기에 암내 낸 돼지와 어리석은 농부를 등장시킨 코믹한 단편 같지만, 그보다는 세금 문제로 농민을 괴롭히는 면서기라든지,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못 살기는 일반’이라는 농촌의 현실이라든지, 또는 ‘한방에서 잠재우고 한 그릇의 물 먹여서 기른’ 소중하기 짝 없는 돼지를 순식간에 앗아간 기차와 같이, 이를테면 문명적인 것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보여주는 다분히 반문명적인 작품이다.
<들>은 이효석의 본격적인 ‘서정시적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서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옥분의 허무한 태도’, 즉 그녀의 절제 없는(야생의) 남성 관계이다. 그것이 ‘마술과도 같은 자연의 매력’으로 오히려 찬양되어 있는 점에서 이효석 특유의 자연주의가 엿보이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은 이른바 인생에 있어서의 기이한 인연 또는 우연이라는 것, 즉 인위적이 아닌 천운이란 것을 매우 짜임새 있게 전개해 보인 가작이다. 흔히 1930년대 한국 단편소설에 있어서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꼽힌다.
<장미 병들다>는 현보와 남죽 두 사람이 연예계에서 바야흐로 출세하려던 때에 ‘첩첩한 시대의 구름의 탓’으로 좌절된 것을 들려주면서, 소녀 시절에는 ‘참으로 아담한 꽃’같던 남죽이 어느 샌가 ‘지향 없는 닥치는 대로의 길, 목표 없는 생활’ 속에서 당연한 절제 없는 생활을 하여 도덕적으로 크게 타락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도 <돼지>와 마찬가지로 다분히 반시대적 또는 반도시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이효석
(李孝石 1907∼1942)
소설가. 강원도 평창 출생. 호는 가산(可山).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 졸업.
이효석은 중학 시대에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경성 제대에 들어가면서 학생들의 동인지 및 좌익계의 <조선지광>에 작품을 발표하고, 동반자 작가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도시와 유령>(1928) <행진곡>(1929), 그리고 경성제대 졸업 직후의 <상륙>(1930) <깨뜨려지는 홍등>(1930) 등이 이를테면 동반자 작가 시대의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에서 이효석은 대체로 도시의 비인도적인 현상에 대해서 강한 저항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1931년에 이르러 좌익계에 대한 탄압이 심해진 한편, 그 자신이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 및 경성 농업학교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게 되면서 도시를 혐오하게 되고, 한편 동반자 작가로서의 경향성을 탈피해서 이전과는 다른 경향의 <오리온과 능금>(1932) 등을 내놓았다.
이효석이 순수 문학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이른바 ‘순연한 연구의 입장’을 내세운 9인회 발기인이 된 1933년 <돼지> <수탉> 등을 발표한 데 이어 <수난>(1934) <분녀>(1936) <산>(1936) <들>(1936) <메밀꽃 필 무렵>(1936) <장미 병들다>(1938) <산정>(1939) <화분>(장편, 1940) 등을 발표했을 때다. 대체로 이 시기에 그가 내놓은 작품들은 이전처럼 반도시적, 반문명적인 요소가 강하기는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자연과 인간의 화해, 인간의 자연에의 회귀 또는 인간의 이상적인 양성 관계를 추구하여 한국 문학에 있어서는 참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이효석은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낙엽을 태우면서> <청포도의 사상> 등 역시 서정성이 높고 뛰어난 미문의 수필들을 여럿 내었으나, 작가로서 거의 정점에 이르고 있던 1940년에 상처하여 만주, 중국 본토 등지를 여행한 뒤 1942년에 36세를 일기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